[옥션리뷰] 한국 미술이 ‘프리즈 서울’에 닿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Ji Young H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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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사①] 100년 전 ‘조선미술전람회’부터 길어 올린 한국 미술 이야기

어느 날, 갤러리에 한 이탈리아인이 찾아왔다. 당시 한국과 해외 아티스트 작품 몇 점이 걸려 있었다. 작품들을 둘러보던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가 대뜸 한국의 한 젊은 아티스트가 그린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자신의 느낌에 바탕을 둔 의견이겠거니 듣고 있었지만, 점점 불편해졌다. 한국 미술계 전반에 대한 비하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살짝 화도 났다. 한국과 한국 미술에 대한 인상 비평만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은연 중에 유럽 우월주의도 드러나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함께 걸려 있던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에 대해서는 어떤 비평도 거부했다.

화가 났던 한편으로 편견과 무지가 어우러진 외부 시선이 가지는 한계를 엿봤다. 그 시선이 품은 해석을 마냥 잘못됐다고 냉소할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가 무지와 편견을 바탕으로 한국(미술)과 아티스트를 비하한 것은 잘못이다. 한편으로 한국 미술도 외부에 자신을 충분히 알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이탈리아인을 비롯해 한국밖에서 한국 역사와 미술, 문화에 대해 가진 오해와 무지, 편견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다.

프리즈 서울 중앙홀에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이 설치돼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허지영
프리즈 서울 중앙홀에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이 설치돼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허지영

지난 9월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이 열렸다. 아시아에서 처음 열린 프리즈는 어마어마한 관심을 끌었다. 과장을 보태자면 서울이 들썩들썩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서울시까지 나서서 내년 프리즈 서울을 ‘이건희 미술관’이 들어설 예정인 송현동 부지에 열어도 좋다고 할 정도였을까. 그렇다면 한국이 갑자기 마술처럼 미술 열풍에 빠져든 것일까? 100년 전에는 과연 오늘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100년 전을 언급한 이유가 있다. 1922년은 한국의 첫 살롱전이라 할 수 있는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린 해다. 선전(鮮展)이라고도 불렸던 이 전람회는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작품 공모전이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뺏긴 상태였다.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 일환으로 만든 전람회였지만, 1945년 한국이 해방을 맞기 전까지 거의 유일한 미술작가 등용문이었다.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아티스트들은 어떤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고 출품했을까.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회를 이어간 선전의 공모 수상작들에는 알게 모르게 시대ㆍ사회적 상황이 담겨 있을 것이다.

프리즈 서울에 참여한 갤러리 현대 부스에 출품된 박현기의 미디어아트. 박현기는 한국 미디어 아트 1세대 작가로 실험적인 미디어 설치 작품을 통해 탈장르화를 시도한 선구자이다. ⓒ허지영
프리즈 서울에 참여한 갤러리 현대 부스에 출품된 박현기의 미디어아트. 박현기는 한국 미디어 아트 1세대 작가로 실험적인 미디어 설치 작품을 통해 탈장르화를 시도한 선구자이다. ⓒ허지영

선전이 처음 열린 이후 정확히 100년이 지났다. 서울은 세계적인 미술 축제이자 크나큰 미술 장터인 프리즈의 아시아 첫 도시가 되었다. 한마디로 놀라운 일이다. 세계사에서 유래 없는 빠른 경제 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렸던 한국은 최근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첫 번째 프리즈 서울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다수의 한국 아티스트 작품도 프리즈에 분명 한자리를 꿰찼다. 100년 역사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고, 과거 없는 현재는 없다. 지나간 시절을 반추할 수 있을 때, 현실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 한국 미술도 그렇다.

한국 현대미술은 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과정을 겪었다. 한국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이념 갈등의 시기를 거쳐 1950년 한국전쟁까지 겪었다. 이념 갈등과 전쟁의 깊은 후유증 속에서 한국 미술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아카데미즘 사실주의에서 탈피하고자 자율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을 적극 수용했다. 불행했던 과거에서 탈피하기 위한 대안으로 추상미술로 표현되던 모더니즘 경향이 확산됐다. 시대적 긴장과 현실적인 문제가 한국 화단을 지배했다. 이에 따라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말까지 실존적 성찰의 의미로 유럽 화단을 주도했던 앵포르멜(L’ Art Informel)경향이나 미국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가 큰 영향을 미쳤다. (②회는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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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 Young Huh
Ji Young Huh
Korean Art market observer & colum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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